옛날, 우리나라는 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논밭을 가꾸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점점 더 잘살기 위해서는 단순히 농사만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자동차도 만들어야 하고, 배도 만들어야 하며, 건물을 짓기 위한 철강도 필요했습니다. 또 전기를 만들기 위해 발전소도 세워야 하고,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기계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무겁고 큰 물건을 만드는 산업을 중화학공업이라고 부릅니다.
'중화학공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중공업으로, 철강, 기계, 자동차, 조선과 같이 크고 무거운 제품을 만드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화학공업으로, 플라스틱, 비료, 석유화학 제품 등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키우는 것을 중화학공업 육성이라고 합니다.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약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스스로 무기를 만들거나 대형 공장을 돌릴 만큼의 힘은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튼튼한 기계, 자동차, 철강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더 강해질 수 있다!” 이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1973년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입니다.
이 정책은 단순히 공장을 많이 짓자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더욱 발전하고, 다른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반을 다지는 일이었습니다. 마치 튼튼한 뿌리를 내린 나무가 오랫동안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중화학공업은 우리나라가 더 크고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1973년에 시작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왜 필요했는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결국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왜 중화학공업을 키워야 했을까요?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장은 가벼운 제품을 만드는 데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옷, 신발, 가방 같은 것들은 많이 만들어서 팔았지만, 자동차나 철강, 조선 같은 무겁고 복잡한 물건은 만들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만약 계속 이런 가벼운 산업에만 의존한다면 나라 경제는 튼튼해지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당시 세계 정세도 불안하였습니다. 강한 나라들은 스스로 무기를 만들고, 필요한 자원을 직접 가공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대부분을 외국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판단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도 직접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자동차, 배, 철강, 기계 등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특히 1973년에 일어난 '제1차 석유파동'은 우리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석유 값이 갑자기 크게 오르면서 나라 경제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외부 충격에도 끄떡없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키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자동차 산업, 조선 산업, 철강 산업, 기계 산업, 석유화학 산업 등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나라의 기초 체력을 키우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중화학공업을 키우기 위해 정부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대규모 공장을 짓기 위한 땅을 마련하였습니다. 바닷가 근처에 큰 부지를 준비하고, 거기에 자동차, 조선, 철강 공장들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울산, 포항, 여천 같은 곳들이 그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포항에서는 거대한 제철소가 세워졌습니다. 바로 '포항제철'입니다. 이곳에서 철강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철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울산에서는 자동차 공장과 조선소가 들어섰습니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바로 이때부터 큰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정부는 기업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배우게 하고, 새로운 기계를 들여오게 지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외국에서 기술을 배워야 했지만, 점차 우리 기술자들이 직접 기계를 만들고, 공장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 기술 학교와 대학교에서도 과학, 공학 분야를 강화하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기술을 배우고, 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장려하였습니다.
이렇게 정부, 기업, 국민이 하나가 되어 중화학공업을 키워나갔습니다. 당시에는 돈도 부족하고 기술도 부족했지만,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나씩 하나씩 이뤄나갔습니다.
중화학공업을 키우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을까요?
중화학공업을 키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돈이 많이 들었다는 점입니다. 거대한 공장을 짓고, 무거운 기계를 들여오는 일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당시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적은 자원을 아껴 쓰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투자해야 했습니다.
또한 기술 부족도 큰 문제였습니다. 무거운 철강을 녹이고 다루는 기술, 대형 선박을 만드는 기술, 자동차를 조립하는 기술 등이 아직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술자들이 해외로 나가 배우고, 다시 돌아와서 국내에 기술을 전파해야 했습니다.
환경 문제도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큰 공장이 들어서면서 주변 자연이 훼손되거나, 공장에서 나오는 오염물질로 인해 하천과 공기가 더러워지는 일도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경제를 살리는 것이 가장 급하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환경 문제를 깊게 생각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도 문제였습니다. 새로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 일해야 했고, 일의 강도도 매우 높았습니다. 이로 인해 노동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점 커졌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국민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끈질기게 노력하여 중화학공업을 한 단계씩 성장시켜 나갔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점차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조선 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현대중공업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배를 만들 수 있는 회사가 되었고, 우리나라 조선 산업은 세계 1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자동차 산업도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현대자동차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자동차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포항제철 덕분에 국내 산업에 필요한 철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다른 산업들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석유화학 산업 역시 빠르게 성장하여, 플라스틱, 섬유, 비료 등 여러 제품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경제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자신감이 커졌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처음에는 어렵고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을,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로 하나하나 이루어냈습니다. 이 경험은 이후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산업, 반도체 산업 등 새로운 분야에서도 세계를 선도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단순한 산업 발전을 넘어서, 우리나라가 강한 경제력을 갖춘 나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뿌리는 여전히 대한민국 곳곳에서 튼튼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